
인수봉길 빨래골교 위에 페인트 가게가 하나 있다.
가게 오른편으로 벤치 몇 개가 놓인 쉼터가 있어 출근길에 종종 들러 쉬곤 한다.
쉼터가 먼저였는지, 페인트 가게의 압도적인 풍경이 먼저였는지 기억은 희미하지만
어쨌든 이유 없이 마음에 들어 그닥 힘들지도 않은데
일부러 들러 쵸코바도 까먹고 담배도 피웠다.
몇 번을 들르다 보니 자연스레 주인어르신과 마주칠 수 있었는데,
그 만남이 처음부터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.
첫만남
(나는 창문너머로 가게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)
어르신: 뭐여?
나: 아, 아닙니다. 그, 그냥……
어르신: 뭐여……
두 번째 만남
(나는 사진을 찍고 있었다)
어르신: 뭔 사진을 찍어?
나: 아, 아닙니다. 그, 그냥…… 지나가다……
어르신: 사진 찍을게 뭐 있다고, 어서 나왔어?
나: 그런거 아닙니다. 죄송합니다.

그리고 오늘, 출근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또 들렀더니
멀리서 봐도 익숙하던 그 색깔이 아니다. 앗, 이게 무슨 일이야?
나: 안녕하세요?
어르신: (고개를 까딱하신다)
나: 가게를 새로 칠하시네요?
어르신: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, 이게 나무로 지은 가건물이어서, 칠이 다 떴어.
내가 직접 칠하면 되는 거니까, 그래서 칠하지.
나: 지난번 칠이 되게 멋있었습니다. 그래서 자주 들렀어요.
어르신: (갑자기 두 손을 모으시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) 그랬구먼. 감사합니다.
나: (급당황) 아이고, 아닙니다.
어르신: 칠이 다 떴어, 다 일어나서……
나: 색이 지난번보다 더 밝아졌습니다.
어르신: 응?
나: 색깔이 지난번엔 더 진한 파란색이었는데.
어르신: 응, 그랬지.
나: 근데 오늘 비가 올 것 같네요.
어르신: 페인트가 유성이라 비와도 괜찮아. 비오면 집에 들어가면 되지.
지금은 칠하느라 셔터를 닫아놨는데, 셔터 열고 들어가면 돼.
나: 그래도 새로 칠하시는데 비오면……
어르신: 응. 비오면 아무케도……
나: 가게가 멋있어서 지나가는 길에 가끔 들러서 구경합니다.
어르신: 다 떠서 새로 칠해야 돼.
나: 네, 다 칠하실 때 쯤 또 들를게요.
어르신: 그랴, 고마워.
나: 비 오면 들어가시고요, 수고하세요.
어르신: 자네도 빨리 가.
어르신 안경에는 페인트가 잔뜩 튀겨있었다.
나머지 출근길을 내달리며 비가 내리지 않길 바랬지만
언제부터 약속을 그렇게 잘 지켰다고, 요즘 일기예보는 참 잘도 맞아
이내 몇 분 후 내 고글에 빗물이 튀기기 시작했다.
비가 오면 셔터 열고 들어가면 된다.
